문장수 수필가
(공학박사, 기술사)
내 고향 친구들 모임의 명칭에는 죽(竹)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만 우정이 변치 않음과 고향 맛이 나는지 청죽회(靑竹會), 죽향회(竹鄕會). 죽림(竹林) 등이 있다. 대는 매년 봄에 나오는 새순을 죽순(竹筍)이라고 한다. 땅 위로 고사리마냥 죽순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면 하루 만에 90㎝ 정도 폭발적으로 자란다. 한 달여 만에 20~30m 자라는 것이 보통이다. 1시간 동안 생장 속도는 소나무의 30년 생장 길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늘 푸르러서(靑)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젊어진다. 몸은 비록 늙어져도 마음만은 대처럼 젊게 살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대는 뿌리를 땅에 심으면 뿌리를 내리는데 4~5년, 때로는 10년이 넘게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하지만 지루함을 견뎌내고 물과 거름을 주며 정성껏 관리하면 5년쯤 되는 해에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성장할 준비를 5년간이나 하고 있었고, 오랜 시간 인내의 자양분을 받은 보답을 하게 된다.
대나무순을 죽순(竹筍)이라 하는 것은 열흘(旬)이 지나면 죽순을 먹을 수 없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죽순은 봄나물 중 최고급으로 친다. 입맛도 좋지만 미락가들이 즐겨 찾기에 고급 요리에 속한다. 죽순껍질을 벗긴 다음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쫑쫑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최고의 맛이다. 죽순 맛을 한번 보면 상장(喪杖:상제가 짚는 지팡이)도 부수어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죽순이 귀한 대접을 받다보니 값도 비싼 편이다. 죽순을 쉽게 많이 확보하는 방법이 있다. 헌 항아리를 죽순 위에 덮어두고 햇볕이 들지 않게 거적으로 덮어준다. 죽순은 항아리 안에서 뱀이 똬리를 트는 것 마냥 뱅뱅 돌아가면서 자란다. 죽순 줄기가 콩나물처럼 연한 빛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 3~4일 정도이면 충분하여 죽순의 밑 둥을 잘라 항아리에서 죽순을 꺼내기만 하면 된다.
대나무는 여러모로 쓰인다. 뿌리는 공예품, 죽순은 나물로, 죽순의 껍데기는 말려서 가공품으로, 대의 줄기는 각종 대나무 공예품으로 만들어진다. 대는 강하면서도 강하지 아니하고 연하면서도 연하지 아니하여 사람이 쓰기에 편리하여 제품 또한 다양하다. 이른바 곰방대, 대빗자루, 죽통, 대젓가락, 피리, 활, 대소쿠리, 대바구니, 대광주리, 대삿갓 등 십 수가지가 있다.
대나무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일부만 살아남아도 몇 년 후면 대나무 밭으로 다시 바뀌어 지고 만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서 유일하게 생존할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 바다가 얼 정도로 추워도 그 잎이 떨어지지 않고, 쇠가 녹을 정도로 더워도 마르지 않는다. 새파랗고 싱싱하여 사계절 변하지 아니하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강풍에도 흔들리고 휘어질지언정 쉬이 부러지지 않는다. 아무리 외부의 강풍이 와도 뿌리가 뽑히는 법이 없다. 대나무 꽃은 대나무씨앗 번식과는 상관없지만, 꽃이 필 경우에는 대나무 밭 전체에서 일제히 꽃이 핀 후 일시에 모두 고사(枯死)한다.
60~70년대 담양의 죽세품 가공에 관한 일련의 작업하는 모습을 대한뉴스촬영 시에는 온 동네가 시끌벅적 했다. 이때는 담양군의 13개 면(面)의 주 수입원이 죽세공 가내 수공업으로 활기가 넘치기도 했다. 가내 수공업으로 만들어진 죽세공품은 담양읍에서 죽세품 시장이 5일장으로 열린다. 여기에서 전국의 도매상들에게 팔려 나간다. 전국보급창 역할인 도매상들이 서울이나 부산 등지로 화물을 배달한다.
5일장이 열리는 날은 십리 길을 새벽부터 대바구니를 리어커에 싣거나 양 어께에 짊어지고 간다. 장에 가면 즐거워 마냥 따라들 간다. 리어카를 밀어주기도 한다. 운 좋은 때는 아이스케이크라도 얻어 먹을 수 있고, 운 좋은 날은 짜장면이라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은 주로 대바구니를 만드는 데 잔 손질이 많이 필요하다. 그중 알바 했던 추억들 중 대나무껍질을 칼로 긁어내는 일이다. 또 대나무 길이로 가늘게 쪼갠 대 줄기를 곱게 다듬기 위해 잔 손일을 거드는 것 등이다. 죽순이 자라면 껍데기를 주워 모아 팔기도 한다.
대는 전체적으로 약재로도 사용된다.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댓잎은 해열·거담·청량 등의 효능과 폐렴·기관지염·당뇨병 등의 구갈에 좋다고 했다. 또한 알카리성 스태미나 식품이며 근래에는 항암작용이 인정되어 주목받고 있다. 죽순은 각종 성인병 예방, 피로회복, 스트레스 해소, 불면증 개선, 신경안정 효과, 이뇨작용, 중풍에도 좋아 혈액순환이 잘되게 도와준다. 그러나 다량 섭취하면 결석이나 칼슘흡수 저해 등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대나무를 좋아했다. 시와 그림에도 많이 등장한다. 대는 자라나서 4계절 푸르고 올곧은 절개가 곧다하여 4군자에 대표 격으로 나온다. 조선 중기 시인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의「오우가(五友歌)」에 대는 비목비초(非木非草)의 식물로 사시장청(四時長靑) 변하지 않는 상록을 좋아한다 하였다.
대나무는 동양의 수묵화(水墨畵)에 중요한 소재가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묵죽화(墨竹畵)와 화병과 주전자 등 도자기에도 다양한 형태의 문양으로 표현된다.
대나무의 풍치를 읊은 “국문집총간(韓國文集總刊)”에 수록된 시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모습과 대숲을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가장 깊은 관심있다. 눈에 쌓여 있는 대숲과 대숲에 비가 내리고 있는 정경을 사랑했던 것” 같다. 또 “바람소리와 저녁 그림자, 달빛, 눈에 덮여 있는 차가운 모습은 봄부터 섣달까지 대를 보며 시를 읊을 수 있고 시름을 잊고 상쾌한 기분을 되살릴 수 있다."고 한다.
대나무와 관련된 속담이 있다. “대 끝에서 삼 년 산다”는 말은 역경에 처한 사람에게 좀 더 참고 이겨 나가라는 격려의 뜻이다. “댓구멍으로 하늘을 본다”는 것은 좁은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편협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남에게 얻어맞거나 뜻밖의 일을 당하여 정신이 얼떨떨한 상태를 이르는 말은 “대통(竹筒) 맞은 벙어리 같다” 고 한다. “대못박이”는 대로 만든 못은 뚫을 수 없으므로 너무 어리석고 용렬하여 교육할 수 없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죽순이 흉작인 해는 벼농사도 흉작이고 죽순이 잘 나오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 속신도 있다. 또 죽순이 많이 나오면 비가 많이 온다 해서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꿈에 죽순을 보면 길몽으로 자식이 많아진다는 이야기와 꿈에 죽순을 꺾어서 돌아오면 외손자를 얻을 태몽이라고 한다.
중국에도 죽림칠현의 고사가 있다. 266년경 위(魏)에서 진(晋)나라로 왕조가 바뀌자 죽림에 들어가 세속과 교제를 끊고 술잔을 나누며 청담(淸談)에 열중한 7명의 선비를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 부른다. 죽림은 탁한 속계와는 멀리 떨어진 장소로서, 철학적 담론 이른바 청담(淸談)을 논의하는 데는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여겨 왔다. 이후 고려에서는 죽림칠현의 뜻을 살려 이인로(李仁老)등 죽고칠현(竹高七賢)이 생겨났다.
요즘은 동남아, 아프리카에서도 대나무를 가지고 만드는 죽세품들이 국내외 TV에 소개되기도 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플라스틱이 출시되면서 대를 이용한 죽세품은 그 자리를 물려줘야만 했다. 그나마 담양의 죽세공예품들은 중국과 동남아의 제품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렇듯, 경제, 사회, 문화, 역사에 묻혀있는 채 지금도 대는 여전히 그 푸르름을 잃지 않고 올곧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