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태 (安元泰) 박사
한국국립공원진흥회 회장
첫눈이 내리는 날 “박근혜 하야!” “박근혜 아웃!” 이란 피켓을 들고 광화문광장에서 시작 된 촛불 시위가 경복궁 앞까지 메운 TV 영상은 100만 190만의 국민이 참여 한다는 자막을 띄우고 있습니다. 이 엄중한 상황에서 저 자신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흉탄에 목숨을 잃고 영구차에 실려 국립묘지로 떠난 이 청와대에 10대 초반의 소녀로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의 학창 생활을 대통령의 딸로 이 청와대에서 마치고 유학을 갔습니다. 어머니가 흉탄에 돌아가셨다는 급보를 받고 귀국해서는 외로운 아버지를 돕는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했습니다. 사춘기를 지나고 성인이 되는 인성 형성기간 동안, 학교나, 모임에나, 개인 활동이나 공식 활동이나 모두 경호원이 함께하고 짜인 일정계획에 따라 살았습니다.
남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명동을 거닐고 캠핑을 가고 미팅에 나가고 친구 집에 놀러가고 하는 지극히 당연한 학창의 추억을 갖기 어려웠습니다. 버스 회수권, 공연장 입장권을 사고, 열차나 비행기를 예약하고, 필요한 서류를 챙겨 여권을 발급받고 그런 경험도 없습니다. 은행에 통장 만들어 예금, 송금, 출금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모두 누군가 해주는 일들이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이 왕따는 아니지만 시끌벅적하게 어울려 다니지 못하고 조용히 공부나 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동생 근영과 지만은 조금은 자유스러운 학창 생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영이는 아주 영특하고 활발하고 사귐성이 있어서 경호원을 따돌리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해서 부모님과 주변분들 애를 먹이기도 했고, 지만이는 남자여서 친구사귀기가 누나들보다 쉬웠습니다. 저는 이런 동생들의 학창생활이 부러웠지만 모든 가정이 그렇듯 맏이에 대한 부모님의 관심과 주의가 많아서 흔히 말하는 자라나기 보다는 길러진 애덜트칠드런 어른아이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마저 부하의 총탄에 돌아가시고 영구차가 청와대를 떠나던 날, 저는 하늘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한꺼번에 뒤집어져 소용돌이치는 느낌이었고, 이 심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누구도 없었습니다. 학창시절 속 털어놓고 얘기하던 친구도 없었고, 친척도 자상한 얘기 주고받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동생들이나 모든 국민의 눈에는 의연하고 침착하게 보여야한다는 생각에 더 외로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청와대를 떠나던 날은 아무리 밝은 표정,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했으나 뜻과 같지가 않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흉탄에 운명하시어 장의차에 실려 떠나신 이 청와대를 고아가 된 삼남매만 살아서 나간다는 것이 정말 슬펐습니다. 차라리 우리가족 모두가 죽어서 떠났으면하는 비장한 생각을 하다가도,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국민의 환호 속에 여기를 떠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만이라도 함께 떠날 수 있었으면 얼마나 마음 든든할까? 동화 같은 생각도 했습니다. 남들처럼 결혼이라도 해서 남편 시부모 시댁 어른들이라도 있으면 좋을 걸 싶기도 했습니다.
청와대를 떠나던 며칠 전부터 여기를 나가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까? 취직을 할까? 프랑스 유학을 마저 마치고 돌아와서 대학엘 갈까? 결혼도 해야겠지? 지만이는 군인의 길을 가겠으니 좋은 아내를 만나게 해야지, 근영이는 영리하고 똑똑하니 알아서 하겠으나 훌륭한 음악가 교수가 될 테니 그길로 갈 수 있도록 유학길을 알아 보고, 신랑감도 잘 고르라 해야지-. 우리들 결혼상대는 서로 상의해서 골라야지-. 그러려면 우선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배워 익히고 세상살이를 배워야겠지? 어떻게 누구에게 배울까? 오만 생각에 잠을 설쳤습니다.
청와대를 나와 맨 처음 느낀 어려움은 일상생활에 대한 무식함이었습니다. 마치 외딴 섬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때까지 밥 짓고 반찬 만들어 본적 없고, 빨래 청소 제대로 해보진 않았지만 이런 일들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우미 구하고 장보는 일부터 일상생활에 필요한 크고 작은 일들은 완전히 초보여서 어데 가서 뭘 할 수 있는지? 무엇은 어데 가야 살 수 있고 신청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경호원이나 비서진 등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집 아이들은 세상물정 모르고 자라서 일생을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한다며 일종의 사회적 미숙아라 한다는데 우린 딱 그 수준이었습니다.
우리 사촌 언니는 내외분이 모두 우리 부모님과 친근했고, 여러모로 힘이 될 수 있었으나 새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정치적 혼란의 중심권에 들어 곤욕을 치르느라 우리를 챙길 수가 없었고, 아버지를 돕던 많은 분들도 수사기관의 조사나 감시가 심한 대상들이거나, 더러는 새 정권의 관심권에 있어 연락드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도 찾아 오는 이 없고, 찾아갈 곳도 없는 생활 속에 그래도 밝은 성격에 성적도 좋아서 학교 친구도 사귀고 친구집도 다니고 했던 동생들이 세상살이에는 저보다 아는 것이 많아서, 친구들에게 묻기도 하며 의지했습니다.
요즘 수사 진행, 국정조사, 특별검사, 탄핵까지 이어지는 국정개입 논란에 오른 사람들은 이무렵 우리에게는 고마운 자원봉사자 였으며, 사회생활에서 초등학생 수준인 우리가 세상살이에 익숙해지는 초 단기과정의 과외교사였습니다. 대통령의 자녀들로서 학교 숙제 외에는 스스로 걱정하거나 마련해야 할 일이 없었던 우리들에게 새로운 경험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살이는 이 사람들의 입력이 깊이 인식 되었을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경호 경비 속에서 암살자의 총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통령의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이 함께 한 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을 상주로서 겪었고, 청와대를 나오자 하루아침에 아버지의 옛 부하들이나 친지들의 발길이 어렵게 된 세상, 일가친척도 내왕이 쉽지 않은 정국이었습니다. 그 땐 “세상에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정말 이구나 느끼기도 했습니다.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했고 아버지의 총애와 신임을 받던 신 군부가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사람을 믿으려하지 않고, 마음을 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면 실제사회에 들어선 초입 때에 느낀 생각이 제2의 습관이 된 것은 아닐까 합니다.
요즘 청와대의 실세비서관이라 소문난 분들이 검찰조사에서 “대통령의 지시로 했다“고 진술했다는 보도를 볼 때면 대통령비서실이란 본래가 대통령의 명령 지시를 받는 것이 당연하고, 물을 것도 없는 확실한 기능인데, 왜 구태여 ”대통령의 지시로 했다“하는지? 그럼 책임이 없어 지는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국정 최고통치권자의 비서실은, 최고통치권자의 지시와 승인으로 일하되, 대외적으로는 자기책임아래 하는 것으로 훈련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그 계급에 비하여 많은 특별기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시켜서 했다“가 아니라 ”대통령(최고통치권자)의 시책을 이루기 위하여 내 판단으로 했다“ 해야 하고, 그렇게 하더라도 수사관은 물론 세상이 ”대통령 모르게 했을리 없다”고 믿고 또 그렇게 믿는 것이 맞습니다. “대통령이 시켜서 했다”고 검찰에서 진술 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아버지 배신했던 사람들과 같게 여겨 또 배신당했다며 사람에의 불신감을 느껴야 하겠습니까? 이젠 저도 그럴 나이가 지났습니다.
대통령 책임제국가에서 대통령은 최고의 통치권자로서 개성과 정치신념 통치철학에 따라서는 제왕적대통령이 될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국가경영의 최종적인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저 박근혜정권의 모든 책임은 고위공직자나 경제인 언론인 종교인 정치인 학자 법조인 무속인 사기꾼 누구의 추천을 받아서 사람을 썼건 정책을 폈건 그 책임은 모두 대통령인 저에게 있습니다. 그 책임을 피하지 않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변명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경영은 변명이 있어서는 안 되고, 변명을 용인 할 수 없기에 최고의 통치권력을 맡긴 것이라 믿습니다. 더러는 살아가며 회고록으로 변면 아닌 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있지만-
저는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법률에 근거하여 따르려합니다. 헌법 제69조의 대통령 취임선서가 명시한 "헌법 준수, 국가 보위, 조국의 평화적 통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민족문화의 창달,“ 이란 대통령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였는지 반성하고 책임을 지겠습니다. 비선실세조직이 국정을 농단 했는지, 그게 어떤 것인지 형사재판과 국정조사와 특별검사의 수사결과에 따라 겸허하게 책임을 지겠습니다.
다만, 법률적 합리적인 방법이 아닌 “하야”는 신중해야 하겠습니다. 데모와 시위로 대통령이 “하야“하는 선례는 어떤 경우에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이 된 것도,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 된 것도 국민적 절대지지로 전 정권을 무너뜨려서 였습니다. 요즘의 촛불시위를 보면서 “국민을 바라보지 않으면 국민에 의해서 망하고, 국민만 바라보면 국민과 함께 망한다.”는 말이 생각 됩니다.
저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법률적인 책임이 아닌 시위나 정치인에 의한 정치적 편의를 위한“하야”로는 청와대를 나가지 않겠습니다. 국민의 기대를 보답 못한 제가 헌법에 없는 “하야”로 「헌법 준수」라는 대통령 취임선서의 첫번 책임마저 위반하는 선례를 남길 수는 없습니다. 단군이래 빈곤을 물리친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 받는 아버지와 품격높은 영부인으로 사랑받던 어머니가 영구차에 실려 떠난 이 청와대를 못난 이 딸이 성난 군중과 서두르는 정치인들에 갈기갈기 찢겨 수습할 수 없는 주검이 되더라도, 명성황후와 같이 불태워 죽임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헌법을 지키다 죽어 나간들 오히려 영광일수 있다는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게도 인간적인 희망은 있습니다. 법률에 근거한 책임을 지고 그동안 내 잘 못으로 소원했던 동생들과 올캐와 조카들이 환하게 웃는 마중 속에 청와대를 나서는 것입니다. 몇 분이라도 제 형편을 이해해 주는 분들이 손 흔들어 주신다면 두 손 모아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응분의 책임이 다 마쳐지면 수녀원에 들어간 심정으로 조카들의 차분한 고모로 동생들의 정겨운 언니와 누나로 살아가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