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태 (安元泰) 박사
한국국립공원진흥회 회장
안원태 박사는 광주 서중, 광주고, 서울대문리대, 국민대대학원(경제학박사). 한국일보 기자. 한국산업개발연구원 부원장. 한국경제사회연구원 원장. 국토환경연구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사람 생긴 대로 논다는 말에 관상이 학문 반열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럴 법 한 얘기들이 전해 온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최영장군을 비롯한 고려 개경출신 주류세력들의 눈총 받던 무렵 얘기라나? 사냥 나갔다 해가 저물어 산사에서 묵었다. 아름드리 통나무를 지고 저자거리를 걷는 꿈을 꿔, 아침 공양머리에 주지스님에게 얘기 했더니, 물끄러미 쳐다보던 스님이 책을 한권 꺼내서는 ‘책장 넘겨 아무거나 한 글자를 짚어보시라 했다.’ 그가 펼쳐 짚은 글자는 물을 문(問)자였다. 책을 덮고 한 글자를 더 짚으라 하니 지아비 부(夫)자였다.
그러자 스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주위를 모두 물리치더니, 앉음 세를 바로 하고는 “군왕이 되실 터이니 자중자애 하십시오.” 했다. ‘꿈에 통나무 세 개를 짊어졌으면 임금 왕(王)자요, 물을 문(問)자를 짚었으니, 왼쪽, 오른쪽 어느 쪽을 읽으나 모두 임금 군(君)자인 데에다, 지아비 부(夫)자는 하늘을 뚫고 오르니 군왕이 된다는 풀이 입니다.’ 했다. 물론 전설 이렸다.
하지만 이 얘기 전해들은 건달이 글자 풀어 점치(破字占)는 스님에게 이성계와 똑같은 꿈 얘기를 하고, 똑같이 問과 夫를 짚었더니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어깨, 허리, 발목에 큰칼 족쇄 채워 귀양살이 갈 꿈이요, 문에다 입을 걸었으니 거지 면치 못하며, 당장 오랏줄에 묶이리라” 했다니 아무래도 생김새가 작용한 것 아닐까?
세 사람의 가난한 과거준비생들이 시원하고 조용한 산사에서 피서와 공부를 겸할 셈으로 아담한 산사를 찾아갔다. 입만 들고 찾아든 이들에게 나이든 주지스님은 넉넉지 못한 산사의 외로운 생활을 감당 할 수 있겠느냐 다짐을 받았다. 삭신이 아프고 이가 흔들릴 지경의 공력을 쏟고 있노라 확인하자 숙제를 냈다. 그 숙제란, “다른 날 보다 한 식경이나 지나서야 기다리던 공양 알리는 바라 소리가 나서 전력질주로 달려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깎은 머리가 유난스레 뻔질거리는 스님들이 뒹굴며 손뼉 치며 가가대소로 웃어 댔다. 저들끼리 짜고, 미리 챙겨 먹어버린 뒤에 바라를 울려서, 주린 배 움켜쥐고 달려 온 과거준비생들을 빈정대며 지루한 산사수련의 우스개를 만든 것이었다.” 이 때의 감정을 지금 당장, 한 글자로 써 내보이라는 것이었다. 세 사람이 저마다 써 냈다. 주지스님은 각자에게 설명을 하라 했다.
첫 번째 젊은이는 성낼 노(怒)자를 썼다. ‘중이란 것들이 제 손으로 농사짓는 일도 없이 중생을 구한다는 구실로 시주받아 먹고 사는 주제에, 우리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희롱해! 두고 보라지 내가 꼭 오늘의 울분을 갚아 줄 테다.’ 주지스님은 강평을 했다. “젊은이는 아주 깐깐한 판관(요새로 치면 검사장?)이 되겠네.”
두 번째 젊은이는 슬플 비(悲)자를 썼다. ‘내가 넉넉지 못하여 공짜 밥을 얻어먹으며 지내니, 저 까까머리 중들까지 날 없인 여겨 선비로서 겪지 못할 모욕을 당하는구나. 뼈를 깎는 노력을 해서 이 비애를 벗어나고, 자식들에게는 이 슬픔을 물려주지 않겠다.’ 스님이 말했다. “젊은이는 훌륭한 학사(요새로 치면 교수쯤?)가 되겠네.”
세 번째 젊은이는 웃을 소(笑)자를 썼다. ‘하하 이 중놈들 사내구실 사람구실 제대로 못하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끼는 살아 있구나. 그래 그렇게 사람다운 데가 있어야 成佛은 몰라도 큰 스님 비슷하게라도 될 수 있지! 야! 너들도 웃는 구나 좋다! 같이 웃자꾸나! 주지 스님이 평했다. “젊은이는 領相, 못해도 左議政은 할 거요!”
엄처시하 대감이 소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첩 두는 것이 상류사회의 필요충분조건도 되던 시절이나, 소문난 마나님 눈총에 참아 왔는데, 교양 있는 기생을 소실로 드린다면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마님이 하달한 선발기준에 따라 기생어멈이 맵시 솜씨 말씨 맘씨 등 네 가지 부덕을 갖춘 진 선 미 세 기생들이 결선에 올랐다. 대감의 관심사항은 자신과 마나님 사이에서 탈 없이 지내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 해주는「재치」의 수준이다. 최종합격자의 선택 경위를 마님에게 설명해야 하겠기에 후보들에게 각자 몸과 도구로 좋아하는 글자를 만들어 보라 했다.
첫 번째가 아이를 안고 왔다. 곱고 정숙한 인상이다. 좋을 호(好)자다. 좋은 여인으로 자식도 기른다는 글자 뜻은 좋으나, 자식이라니 마님이 탐탁지 않을 듯 싶다.
두 번째 후보는 큰 갓을 쓰고 들어왔다. 상냥하며 서글서글하겠다, 편안 안(安)자다, 집안 편안하게는 마음에 드나, 여자가 갓을 쓰면 무당 된다는 말이 걸렸다.
세 번째 기생은 빗자루를 들고 다소곳이 들어왔다, 깔끔하며 듬직하게 새겼다. 며느리 부(婦)자다. 며느리처럼 집안을 깔끔히, 알뜰히 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세 번째를 골랐다. 마님의 흡족함은 물론, 家和萬事成을 이뤘다.
이번엔 현대판 얘기다. 연휴기간,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중에 황제의 긴급소집령이 내렸다. 일반 통신은 모두 끊겼다. 몇 사람의 대신들이 모여 사는 마을 어귀에 이르자 비바람은 멎었지만, 그냥 건너뛰기에는 넓은 계천의 교량이 폭우로 떠내려가고 없다. 주변을 둘러봐도 튼실한 통나무는 없다. 사방을 헤매던 국방대신이 겨우 닿을만한 널빤지를 찾아 들고 와서는 걸쳐 놓더니, 복구에 병력동원이 시급하다며 성큼 건너 뛰어갔다.
내무대신도 중앙과 지방의 민심을 챙겨야 한다며 훌쩍 뛰어 건넜다. 두 사람 건넌 것을 확인한 외무대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하는 것이라며 폼 잡고 건너는데, 두 사람 건너는 동안 금이 간 널빤지가 우지직 조각이 났다 ‘나 살려!’ 외마디 지르며 탁류에 휘말린 외무대신은 아직 소식이 없다. 이 외무대신은 항상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한다며 뒷북치기로 소문나더니 너무 두드려만 보다가 끝내는 급류에 흘러간 것이라고들 했다. 지어낸 말이겠지 싶다.
이 토막 얘기들 ‘그래그래!’ 함직 하지 않을까? 극단이란 끝자락 모퉁이에 매달려, 저도 잘 모를 듯 어려운 말 지껄이는 의식화 철학자 보다는 당산나무 아래 땀 식히는 시골 할베에게서 체험 철학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민담(民譚)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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