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자(출판인)
어떻게 삶을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종교와 성현군자들의 긍정의 글과 행복을 주는 희망의 메시지가 넘쳐나고 있다. 인간이 그만큼 불안하고 외롭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긍정의 글과 행복의 메시지가 얼마나 위로가 됐을까?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절망, 외로움은 꼭 세상의 문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절망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세상과 격리되어 있고 구제할 길 없는 외로운 인간이라면, 세상과 마주하여 어떻게 무엇을 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고통스러웠던 경험만을 잊고 싶어 한다. 가장 가혹한 역설은, 기억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기억은 지워지는 반면, 모든 것을 잊고자 하는 사람의 기억은 흔들림 없이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에밀 시오랑이 모국어인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사유(思惟)한 모든 것을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옮겨놓은 허무주의 철학자로 그가 쓴 책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서 한 말이다.
루마니아 출신의 가장 프랑스적 산문가, 파리 대학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 영원한 학생, 루마니아에서 잠시 철학 교사직을 맡았던 것 외에 평생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보지 않았다. ‘공원을 조용히 거닐고 싶다’라는 핑계로 언론의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던 절대 소외자인 시오랑의 글은 누구든 마주하기 힘든 고통, 불안, 허무, 절망, 고독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글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고 절망스럽게 한다. 그렇지만 인간 본질에 내재한 절망에 익숙하게 될 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글과 지극히 염세적인 그의 시각은 독자들에게 상당한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격정과 정열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 주는 그의 태도는 흥미롭다.
“산다는 것은 너무나 외로운 일이다. 동정이나 연민은 소용없을 뿐 아니라 모욕적이다. 게다가 자신이 끝없이 고통스러운 마당에 어떻게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할 수 있는가? 동정심에는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흔한 것이다.”
에밀 시오랑은 흔한 동정과 연민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세상은 온통 탐욕과 광기로 가득 차 있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복잡해지고 어렵다고들 한다.
호기심과 모험으로 충만해 있어야 할 아이들은, 1등만을 인정하는 경쟁을 부추기는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우정을 내버리고 그들의 미래를 포기하게 하고 만다. 대학졸업 꿈과 희망을 안고 사회 첫발을 내딛어야 하는 젊은이들은 취업난과 빚으로 이미 그들의 젊음과 비전을 잃고 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3포 세대라고들 한다. 기성세대는 어떤가. 불안한 노후와 팍팍해진 삶으로 노년은 더 힘들기만 하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 수없이 많은 힐링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저 달콤한 말들뿐이다.
에밀 시오랑은 우리가 겪는 절망을 직시한다. 어설프게 위로하지 않는다. 절망을 절망 자체로 응시하며 그 절망을 넘어선다. 절망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했기에 오히려 그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는 역설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시간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간다. 힘들고 절망적인 이 순간도 시간이 흐르면 그 고통도 희석된다.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시간은 이렇게 와서 그렇게 가는 것 같다. 그렇게 해는 다시 떠오른다. 그토록 괴로웠던 절망의 이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태양이 뜰 때가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왜 그토록 절망을 이겨내려고만 하는 것일까. 겸허히 그 절망을 받아들이고 그 절망을 내 안에 갈무리할 수는 없는 걸까. 그것이 곧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이 아닐까?.
사회비평가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긍정의 배신’에서 자신이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녀는 암투병 중 그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암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위로의 말들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암은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해준 선물이라는 투병자들의 수기,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것이 암의 위험을 줄일 것이라는 입증되지 않은 과학 등이 만들어 낸 ‘긍정’의 투병문화 때문에 그녀는 유방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충분히 슬퍼할 겨를 새도 없이 힘겨운 치료 레이스에서 긍정의 사고를 강요당해야만 했다.
우리 현실도 마찬가지다. 좋은 스펙을 갖지 못하는 것, 취업하지 못하는 것, 친구나 동료와의 사이가 좋지 못하는 것, 노후가 불안정한 것 등등 현실적인 난제들이 산재해 있다. 이는 자신이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해 동기유발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문화가 점점 만연해 가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긍정의 한 줄’을 마음에 새기고 동기유발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나 생채기를 긍정이라는 단방 약으로 덧칠한다고 상처가 낫는 것은 아니다. 결국 긍정이라는 외피에 갇힌 상처는 오히려 곪아 썩어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현실을 회피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현실을 타개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외면한다 해도, 현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현실을 치유하고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것을 제대로 직시하고 성실하게 마주하여 부딪치는 것이다. |
